Do You Mind If I Look At You

평일의 언어 0010

Pyeong_il 2017. 5. 11. 19:57

 

 

 

<도서관 기행>

 

 

 

도서관의 물기 어린 냄새를 나는 좋아한다. 조금만 습해도 종이들은 숨을 빠르게 내쉬고, 곧이어 처음의 눅진했던 냄새가 따듯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청량한 느낌이 드는 냄새로 뒤바뀔 때의 도서관. 고요히 앉아있자면 평소에는 거들떠도 보지 않을 것 같은 경제 서적의 표지마저 흥미롭고, 온 몸을 감싸는 하늘색 싸구려 가죽 소파가 아늑해지는 순간. 콧속으로 시시각각 스며드는 습함이 오늘따라 반가워서 나는 종이처럼 급하게 숨을 쉬었다.

 

밖을 보니 아직도 해가 전부 사라지지는 않은 것 같았다. 시간이 7시가 넘었는데도 하늘은 그저 희뿌열 뿐이었다. 겨울에는 여섯시가 채 안 된 시각부터 뉘엿뉘엿 해가 저물기 시작하여 눈 한 번 깜빡이는 것보다도 빠른 속도로 거먼 밤이 다가오곤 했었는데, 온도가 올라간 만큼 해가 늘어지는 모양이었다. 간간히 사람들은 반팔을 입을 정도로 날씨는 더웠다.

 

내가 빼어든 책은 그런 계절과는 영 맞지 않는 목욕탕이라는 책이었다. 책 속의 파란 글자들만큼 종이마저 이상하리만치 냉담한 책. 겨울에 읽으려고 가을부터 아껴두었다가 막상 겨울이 되니 너무 차서 이른 봄까지 주욱 미뤄버린 기억이 있다. 책은 자랑스럽게 읽었다고 말하기에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매번 낯설고, 내가 낯설어 하는 만큼 책은 서러워하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서러움은 곧 서늘함으로 바뀌어 나는 그 서늘함에 식은땀을 주루룩 등허리로 흘려보냈다.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제 자리를 지키는 바람마저 진짜 바람이라고 느낄 만큼 으슬으슬 추워지며 몸의 온도가 충분히 온도가 낮아졌다고 느낄 때 쯤, 어디를 읽고 있었던 간에 그대로 책을 덮는다. 목욕탕의 저자는 일본 사람이지만, 이 책을 독일에서 발행했기 때문에 독일 문학이 되었다는 사실은 곱씹을수록 참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책을 단정히 꽂아놓는다. 독일 문학이 냉철하다고 생각한다. 아까의 서늘했던 목욕탕은 어째선지 저 자리에서만큼은 혼자 뜨듯하다. 나는 곧 익숙한 책들이 가득한 일본 문학 분야로 발걸음 한다.

 

비로소 나의 자리에 왔다고, 홀로 생각한다. 고등학교 때부터 애정 하던 온다 리쿠의 책부터 낯설기가 더 어려운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들, 몇 권의 책은 읽은 것도 같은 오쿠다 히데오나 에쿠니 가오리의 책. 나는 익숙한 책을 다시 한 번 훑는 것에 재미를 느낀다. 읽지는 않았어도 그 이름만큼은 충분히 익숙한 무라카미 하루키나 요시모토 바나나의 책들에도 시선을 한 번 떨군다. 고개를 들어 위 칸을 보니 우연찮게 바나나 빛 행복이라는 책이 있다. 으깨면 뭉근한 느낌과 느닷없이 찾아오는 찝찝한 달큼함이 어째선지 기분 나쁜 과일. 언제부턴지도 모르게 나는 바나나를 혐오했다. 책을 빼들어 저자를 보니 익숙하다. 달팽이 식당초초난난을 지은 오가와 이토. 그녀는 대표적인 일본식 소설을 쓰는 작가다. 달팽이 식당은 음식과 힐링이 주제인 전형적인 일본식 단편 모음집이라 나에겐 조금 진부한 면이 있었는데, 초초난난은 소재가 불륜이지만 소담하고 정갈한 느낌이 생경하고, 그려내는 장면마다 비에 맞은 꽃처럼 푸르게 생생해 아직도 가끔 읽곤 한다. 다만 정서적으로는 조금 답답한 면이 있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추천해주기는 조금 망설여지긴 하다만. 바나나 빛 행복은 역시 내 취향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다시 집어넣지 않는다. 초초난난마저 빼내어 그녀의 책으로만 두 권을 들고 다시 소파로 자리한다.

 

초초난난에도 다양한 일본 음식이 등장한다. 소박하면서도 정갈한 느낌이 종이 위에 가지런히 펼쳐진다. 차를 마시는 장면 마다 어디선가 찻내가 어른거리는 듯하다. 책 속에서 그리는 서글픈 봄에 나까지 움츠러든다.

 

그 새 퍼런 밤이 도래한다. 아까보다 조금 더 상쾌함이 도는 공기를 맡자니, 저녁 산책을 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서린다. 아직까지도 조금은 미지근하게 느껴지는 공기가 싫어서 외투의 지퍼를 목 끝 까지 채운다. 책 두 권을 카트에 밀어 넣고 도서관을 빠져나온다. 책을 만나기에는 역시나 도서관만한 곳이 없다고 생각하면서.